1815년 7월, 존 애덤스 전 대통령은 후임자인 토머스 제퍼슨에게 편지를 보냈다. 두 사람은 수십 년 전 영국에 대항한 독립 전쟁 당시 긴밀한 동지였으며, 독립선언서를 초안한 위원회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정치적, 개인적 견해 차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1800년 애덤스가 재선에 실패하고 제퍼슨에게 패배하면서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1812년 벤자민 러시의 중재로 화해가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시작된 놀라운 서신 교환은 1826년 7월 4일, 즉 독립선언 50주년이 되는 날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아담스는 제퍼슨에게 일련의 질문을 던졌다. “누가 미국 혁명의 역사를 쓸 것인가?”라고 그는 물었다. “누가 그것을 쓸 수 있겠는가? 도대체 누가 그것을 쓸 수 있겠는가? 가장 중요한 문서들, 즉 1774년부터 1783년까지 의회에서 오간 토론과 심의 기록들은 모두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제퍼슨은 간단히 “아무도”라고 답했다. 그는 대륙회의 심의 내용이 비밀로 유지됨으로써 그 역사의 “생명과 영혼”이 “영원히 알려지지 않게 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수십 년 전인 1783년 여름, 존 제이도 같은 문제를 고민했었다.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와 함께 프랑스에 머물며 미국 독립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 지을 조약 협상을 진행하던 그는,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수년간의 정치적·군사적 투쟁을 되돌아보았다. 그는 오랜 친구이자 동지인 찰스 톰슨에게 편지를 보내, 그에게 “혁명의 정치적 이야기”를 집필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제이는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역사는 왜곡될 위험이 가장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세상 그 누구도 당신만큼 미국 혁명의 전말과 결말을 깊이 있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덧붙였다. 

    몇 년 후, 제퍼슨은 톰슨에게 역사서를 집필하도록 권유하는 다른 이들의 서명에 동참했다. 그는 “만약 기록된 자료나 기억 속에 간직한 자료를 보유한 사람이 있다면,”이라며, “그건 분명 찰스 톰슨일 것이라 생각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찰스 톰슨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의 이름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들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가 독립선언서를 승인했을 때 서명된 이름은 존 핸콕과 찰스 톰슨, 단 두 명뿐이었다. 그의 리더십과 1765년 우표법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으로 인해 존 애덤스는 그를 “필라델피아의 샘 애덤스”라고 불렀다. 나중에 톰슨은 회의록 보관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톰슨은 미국 국장의 주 설계자였으며, 펜실베이니아 주 소유주들과 10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간의 분쟁에 중재자로 나서면서 일찍이 청렴한 인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인디언들이…속임수를 당해 땅을 빼앗겼다”고 선언하며, 상호 합의에 의한 권리 주장 해결을 도왔다. 델라웨어 부족은 그를 받아들여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유를 위해 싸우던 톰슨은 노예제를 “우리가 반드시 근절해야 할 암”이라고 규탄했다. 만약 “이것이 뿌리 뽑히고 우리 땅이 자유인들로 가득 차며, 연방이 보존되고 자유의 정신이 유지되고 소중히 여겨진다면, 25년이나 30년 후에는 우리가 세계 다른 나라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 “피를 흘려야만” 이를 근절할 수 있을 것이다.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던 토마스는 『네 복음서의 조화』를 를 출판했으며, 그리스어 70인역  (구약성서)를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다. 종교를 주제로 제퍼슨과 주고받은 방대한 서신들은 두 사람의 신념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프랑스-인디언 전쟁 이후, 톰슨은 국민의 동의 없이 새로운 세금과 규제를 강요하는 영국에 반대하는 세력에 합류했다. 1774년 9월 5일, 제1차 대륙회의는 만장일치로 그를 서기로 선출했으며, 그는 1789년 7월 23일 헌법에 따라 출범한 신정부에 의회의 장부, 기록 및 문서를 인계할 때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다. 이 직책은 단순히 기록을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포함했다. 이는 대통령과 의회 자체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의 행정직이었다. 15년 동안 톰슨의 권위와 중대한 결정들은 의회의 의사 결정 전반에 깊이 스며들었다.

    1791년, 제이는 톰슨에게 다시 한번 역사서를 집필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는 다른 이들도 역사서를 썼지만, “완전성이나 솔직함, 혹은 진실성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제이는 톰슨만이 “사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며, “오직 당신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리에 있었고, 오직 당신만이 파벌이나 개인적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실제 일어난 대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명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톰슨은 자료를 수집하고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1789년 이후 어느 시점에 그는 그 모든 것을 파기해 버렸다. 그는 벤자민 러시에게 자신의 판단 이유를 털어놓았다. “아니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혁명 당시의 중대한 사건들에 대한 기존의 모든 역사 기록들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제가 묘사하는 인물, 동기 조치에 대한 내 설명을 통해, 혁명의 성공적인 결말이 전적으로 섭리의 작용 덕분임을 드러내게 될 테니까요. 세상이 우리 위인들의 소위 지혜와 용기를 칭송하게 두자. 어쩌면 사람들은 그들에게 귀속된 그 자질을 본받아 선을 행할지도 모른다. 나는 후세들을 환상에서 깨우지 않겠다.”